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시간 음반 (문단 편집) === 발표 === 이렇게 해서 약 3년 뒤인 1948년 봄에 새로운 음반의 양산이 실용화 단계까지 올라갔고, 컬럼비아 레코드는 1948년 6월 21일에 [[뉴욕]]의 월도프 아스트리아 호텔에서 Long Playing Record, 약칭 LP의 발표와 시연회를 열었다. 그런데 이 시연회에서 기술 설명과 시연을 담당한 이는 실질적으로 LP 연구와 개발을 주도한 바흐만이 아니라 골드마크였고, 덕분에 사람들은 골드마크가 LP를 개발했다고 아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훗날 월러스타인은 '골드마크가 아이디어를 냈고 연구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LP 개발을 한 사람은 바흐만이다'라고 밝혔다. 어쨌든 골드마크는 발표회장에서 자신의 키를 훌쩍 넘긴 수북한 SP 더미들과 자신이 품에 안은 LP 레코드들을 비교해 보여주고는 '이 SP들은 제가 안고 있는 새 음반들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라면서 LP의 우월한 재생 시간을 선전했고, 또 시연회에서는 SP보다 월등히 향상된 음질을 선사했다. 기존의 SP가 최종 개량 때까지 30~12000Hz까지의 대역만 녹음과 재생할 수 있었던 데 비해, 이 LP는 15000Hz까지 고음역대를 넓혀 소리의 명료도를 한층 향상시켰다. 게다가 뒤틀림이나 갈라짐이 적은 신소재 덕에 표면 잡음도 엄청나게 감소해 듣기에도 훨씬 편했다. SP 시절에는 거의 레코드 하나당 한 개씩 수시로 갈아줘야 했던 픽업 바늘 문제도 대부분 해결되었는데, 새로 선보인 LP 턴테이블의 픽업 바늘은 부식의 위험도 있고 내마모성도 떨어지던 종래의 철 같은 금속 대신 [[다이아몬드#s-1|다이아몬드]]나 [[사파이어#s-1|사파이어]]를 가공한 것이라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또 오디오 시스템의 발달로 사운드박스가 필요 없게 되자, 손잡이와 지지대만 간단하게 달린 훨씬 가벼운 픽업으로 대체되면서 음반을 눌러대던 압력이 획기적으로 줄었다. 컬럼비아 레코드는 발표회 후인 8월에 바로 시장에 LP를 내보냈고, 동시에 새로운 레코드 재생기(턴테이블)도 필코(Philco)에 위탁해 발매했다. 다만 기존의 SP도 재생할 수 있도록 턴테이블에는 LP의 재생 속도인 33 ^^1^^/,,3,,rpm 외에 78rpm 기능도 그대로 들어갔다. 이 새로운 음반과 턴테이블은 엄청난 속도로 보급되었고, 1년 뒤에는 미국의 거의 모든 음반사가 LP로 음반을 낼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컬럼비아 레코드와 달리 라이벌이었던 RCA 빅터는 1949년 2월에 45rpm 음반을 내놓아 독자 노선을 걷겠다고 선언했는데, 이 음반은 재질이나 재생 기술은 LP와 거의 동일했지만 레코드를 꽂는 구멍이 [[도넛]]처럼 상당히 커서 '도넛 판'이라고도 불렸다. 한 면당 재생 시간은 5분 가량이었는데, 음질은 확실히 SP보다 향상되었지만 한 장에 불과 10분 정도밖에 담지 못하는 수록 시간 때문에 결국 1950년 초에 LP를 주력 음반으로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45rpm 음반도 대중음악의 [[싱글(음악)|싱글]] 음반 발매에 계속 쓰였고, 이후 [[익스텐디드 플레이|EP]]라는 명칭으로 불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